민족이 곧 민중이고,
민중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편집자의 증언대로 『민족경제론』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민족경제론’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책의 정신과 바탕에는 ‘민족경제’의 광맥이 흐르고 있지만, 박현채 본인이 이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은 것이다.

박현채가 민족경제론을 보다 정치하게 정리한 것은, 『민족경제론』이 출간된 지 6년 뒤인 1986년에 발표한 논문 「민족경제와 국민경제」에서였다. 이 논문에서 박현채는 민족경제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다소 길지만 인용해본다.

일찍이 우리는 민족경제를 좁은 의미에서 두 측면으로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그것은 존재로서의 민족경제이고 다른 쪽에서는 당위로서의 민족경제이다. 존재로서의 민족경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민족경제는 범세계적인 자본운동의 과정에서 한 민족이 민족적 순수성과 전통을 유지하면서 그것에 의거, 생활하는 민족 집단의 생활 기반이다. 둘째, 이것은 순수 경제적인 자본운동의 측면에서는 국민경제의 형식에 포함되는 하위 개념이다. 셋째,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는 국민경제보다 높은 상위 개념이다. 넷째, 곧 민족경제는 경제적으로 민족주의의 근거이며 외세의 지배하에서도 면면히 계승되는 민족사의 정통의 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 당위로서의 민족경제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된다. 첫째, 민족경제는 한 민족의 정치∙경제적으로 통일체이어야 하며, 둘째, 민족을 위한 힘과 부를 창조하는 과정임과 동시에 장으로서의 민족의 내면적인 생활 통일체이어야 한다. 셋째, 민족경제는 그 완성된 경제적 내용을 국민경제의 자주∙자립을 실현할 수 있는(국민경제의 형식과 내용이 하나로 되는) 국내적으로 완결된 자율적 재생산 구조로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민족경제의 개념은 넓게는 모든 민족사적 시기에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광의의 민족경제의 개념은 민족경제를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할 수 있다. 민족경제는 민족사에서 민족적인 것을 유지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경제적 기초다. 이것은 사회적 인종 공동체의 제1단계(민족, 민족체: 민족 단체의 공동체)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 역사에서 사회적∙인종적 형태(민족적 형태)로 상대적 독립성을 지니고 자기의 발전 가운데 먼 과거의 요소로서 전승되는 정서에서 논리적인 이데올로기 그리고 민족 정책에 이르는 것으로서 그 구체적인 생활양식에 대한 요구로 되는 ‘민족적’인 뜻의 경제적 기반으로 된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민족경제는 한 민족 집단에 있어서 본래적인 것인 데서 정상적인 민족적 생활에서 크게 두드러진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민족 집단과의 관계에서 민족적 생활양식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보다 두드러지고 강조되게 된다.

민족적 위기에 처해 민족적 생활양식이 위협받을 때 자기 생활을 지키기 위한 민중적 저항이 구체화되는 것은 전체적인 민족경제의 존재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다 명확한 것이 된다. 자본주의는 사회적 인간공동체의 최고의 완성 단계인 민족공동체에 그 경제적 기초를 두는 것이지만 자본운동의 범세계성 때문에 민족 간 그리고 다른 사회적 인간공동체와의 접촉을 낳고 이들 간의 민족적 모순을 생기게 한다.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에 의한 시장 개방의 요구는 개방을 강요받는 나라들에 있어서 민족적 생활양식 그리고 민족경제에 대한 위협으로 된다. 여기에 자본주의 발전의 서로 다른 유형에서 민족주의적 표현 양식이 서로 다른 양태가 주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전후의 신식민주의 상황에서도 약간의 표현 양식을 달리하면서 관철되고 있다. 곧 경제 쪽에서 민족주의의 경제적 기초는 민족경제에 있다.

- 박현채, 「민족경제의 이론 구조 (1): 민족경제와 국민경제」, 『한국사회연구』 제4집, 한길사, 1986, 66~67쪽

사실 그가 학문 세계에 발들일 때에는 농업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해방 뒤 인구 70~80퍼센트가 농어민인 상황에서 농업 문제는 민족주의자로서 피할 수 없는 핵심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석사 논문세어소 ‘소농 경제’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1962년부터 농어촌의 희생을 기반으로 수출 산업을 강화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이후에는 외자도입법이 제정되고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에도 가입하는 등 국제경제가 한국경제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에 박현채는 본격적으로 개방 체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에 대한 비판적인 작업을 벌여 나간 것이다. 당시에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게오르크 리스트(Georg List), 칼 뮈르달(Karl Myrdal)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