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세계 기아의 요인과 실태 점검 대책 모색
‘경제적 기아’와‘구조적 기아’의 구분 설명
먹는다는 건 인간 모두가 누려야 하는 천부적 권리

화순저널 hsjn2004@naver.com
2022년 07월 25일(월) 19:35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인류가 지상에 출현한 이래 ‘먹고 살기 위해’ 동분서주 않은 날이 단 하루라도 있었을까? 수렵과 채취로 연명하던 선사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역사에 문화를 새기며 문명을 창조하고 발전시키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먹는다는 것은 인간 모두가 함께 누려야할 천부적 권리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류의 역사는 음식을 모두가 갈등없이 공평하게 누렸던 세상을 단 한 순간도 증거 하지 않는다. 식량은 항상 소수 권력자의 수중에 넘쳐났고 다수의 빈자들은 허리가 휘는 노동에도 불구하고 늘 굶주리거나 그렇게 죽어가야 했다. 이러한 모순은 고도의 문명과 인권을 자랑하는 오늘의 현실에도 크게 달라진 바 없이 여전히 목격하게 되는 참상이 아닐 수 없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이러한 현실의 모순을 고발하면서 기아의 요인과 실태를 점검하고 대책을 모색하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유엔 식량특별 조사관인 장 지글러가 아들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책은 오늘날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음에도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 세계 각처에서 하루에 10만 명이, 5초에 1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불합리하고도 반인권적인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알기 쉽게 설명한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현재 8억 500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아의 위험에 처하도록 몰아간 원인들을 추적한다. 지은이는 FAO의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의 구분을 설명하면서 기아의 원인은 돌발적인 자연재해나 전쟁뿐만 아니라 빈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사회구조의 필연적인 결과임을 밝힌다. 그와 함께 정치 사회 경제적인 문제들, 즉 맬서스의 인구론을 여전히 추종하는 백인 우월주의, 선진국들의 자국이기주의와 식민지 지배로 인한 피식민지국가의 농업 형태의 왜곡과 그에 따른 식량의존과 착취, 곡물과 식품 다국적 기업의 횡포, 기득권자들의 무한 욕망을 추동하는 신자유주의 폭력과 금융과두 지배와 빈민국 지배세력의 부패 그리고 기후 변화에 따른 사막화와 같은 식량 생산 조건의 변화 등이 중첩하며 비극적인 기아와 아사를 낳는다고 진단한다. 또한 구호조직 활동의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지적하면서 기아문제의 해결은 오직 자신의 나라를 바로 세워 자립경제를 실현하는 것 만이 그 첩경이라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배가 터지도록 먹어대다 못해 음식을 함부로 낭비하고 폐기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굶주려 죽는 사람이 공존하는 불평등한 현실과 세계질서에 대한 관심을 독자들에게 촉구하고 재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지금도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식량문제와 그것이 야기한 결과는 인간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인간성을 파괴하는 ‘반인도적 범죄’이며 자연에도 치명적인 훼손을 초래하는 환경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 또한 환기한다. 아마도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고통으로 도래하는 ‘타자의 얼굴’을 진지하고 겸허하게 사유하도록 요청하는 듯하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가뭄 내전 등의 영향으로 나이지리아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이집트 예멘 등의 여러 나라들이 올해도 긴급한 식량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후변화로 전 세계 토마토 생산량도 급속히 감소되어 2050년까지 6% 감소가 예상된다고 하며 중국의 곡창 지대인 동북지역의 비옥한 흑토가 폭우와 풍화작용의 영향으로 전체 면적의 30% 정도가 유실되어 식량생산이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라고 한다. 2020년 현재 식량 자급률이 45.8% 곡물자급률이 20.2%인 한국의 경우도 식량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식량위기는 아프리카나 개발도상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식량자급률이 낮은 한국도 앞으로 10년 안에 겪게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이 경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음식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 생존의 절대 조건이다. 음식이 없다면 인간에게 어떤 활동도 불가능하다. 사회 정치 경제 문화 학문 종교 등 그 어떠한 실천도 모두 음식 이후의 일이다. 이것은 동서고금 지위고하를 막론하여 관통하는 불변의 진리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함포고복(含哺鼓腹)을 삶의 이상으로 여겨오지 않았던가. 오늘 우리 일상에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나중에 밥 한끼 하자’느니 혹은 ‘요즘 무얼 먹고 사느냐’와 같이 먹는 것을 빗댄 여러 말들이 다채로운 뜻을 지니고 흔히 입에 오르내린다. 박경리는 자신의 소설 <토지>에서 굶주림에 직면한 사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흉년의 공포에 한 번 사로잡히기만 하면 농민들은 하늘도 땅도 믿지 않았고 다정한 이웃, 핏줄이 얽힌 동기간도 믿지 않는다. 오직 수중에 있는 곡식만 믿는다.”

옛사람들도 먹고 사는 문제는 인생이 당면한 가장 근본적인 사태임을 고백한다. 맹자는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할 때야 비로소 인간의 도덕적 삶이 가능함(無恒産 無恒心)을 일찍이 언급한 바 있고, 이지(李贄)도 “옷 입고 밥 먹는 것이 바로 인륜이요, 사물의 이치이다. 옷 입고 밥 먹는 것을 제외하면 인륜도 사물의 이치도 없다. 세상의 온갖 것이 결국 옷과 밥과 같은 부류일 뿐이다.”(穿衣吃飯即是人倫物理 除卻穿衣吃飯無倫物矣 世間種種皆衣與飯類耳)라고 강조한 바 있다.

독일의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역시 정신과 자연의 통일인 음식이야말로 오직 실체이며 그것은 스피노자적 Hen kai pân 즉 하나이자 전부로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존재의 본질임을 역설한다. 그에게 “인간은 곧 자신이 먹는 바 그것”(Der Menish ist was er isst)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철학은 관념이 아닌 먹고 마시는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인간에게 음식은 인성의 도야와 태도의 기초이므로 인민에게 선결적으로 양질의 음식이 공급될 때 인간다운 삶과 사회의 건설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民以食爲天)고 했다. 밥이 곧 하늘이다. 하늘을 특정 부류의 소수가 결코 독점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이에게 자유로이 마음껏 하늘을 향유하게 하라! 입(口)으로 들어가는 쌀(禾)이 모두에게 공평(公平)할 때 세상은 마침내 평화(平和)롭지 않겠는가.

<김다록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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