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바카라, 인간이 만든 어둠의 미학/misty_bluerose

흑장미의 이름으로 가장 자주 언급되는 품종이 있다. 바로 블랙 바카라(Black Baccara). 하이브리드 티(HT) 계통의 대표적인 절화용 장미로, 검붉은 꽃잎에 벨벳 같은 윤기를 머금은 그 모습은 마치 어둠 속에서 피어난 불꽃 같다. 정확히는 검은 장미가 아니라, 빛의 각도에 따라 짙은 자주색과 흑색이 교차하는 흑적색의 미세한 그라데이션이 매혹적이다.

이 장미는 단순한 자연의 산물이 아니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품종 개량을 거듭하며 색소의 농도, 잎맥의 질감, 꽃잎의 곡선 하나까지 조율해 탄생시킨 결과물이다.

그 점에서 블랙 바카라는 자연이 빚은 아름다움이자, 인간이 개입해 완성한 예술적 조형물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장미의 원종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이브리드 티의 기원은 신선한 차향이 감도는 중국의 월계화(月季花)로부터 시작된다. 그 이름처럼 한 번만 피는 것이 아니라, 계절마다 다시 꽃을 피우는 지속적인 생명력을 지녔다. 그 유전적 성질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사계절 장미, 그리고 블랙 바카라의 근간이 된 것이다.

나는 예전에 종자 연구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우루과이라운드(UR)에 대비한 농업 자동화와 종자 주권 연구를 맡으면서 한 가지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우리나라의 종자 기술은 여전히 후진적이며, 자연의 생명정보를 다루는 ‘씨앗의 과학’에서조차 우리는 뒤처져 있었다. 그 아쉬움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블랙 바카라를 볼 때마다 그 꽃잎에 단순한 아름다움 이상의 문명적 의미를 읽게 된다. 자연의 유전과 인간의 의지가 맞닿아 새로운 형태의 생명을 창조한 상징,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한 기술과 감성의 융합. 이 장미는 ‘과학과 예술의 경계’ 위에 선 존재다.

흑장미는 오래전부터 ‘영원한 사랑’과 동시에 ‘이룰 수 없는 욕망’을 상징해왔다. 그 모순된 상징처럼 블랙 바카라의 색은 언제나 두 가지 의미를 품는다. 어둠 속의 열정, 그리고 끝을 알기에 더욱 강렬한 생명력. 그 대비가 바로 이 꽃의 본질이다.

한 송이의 블랙 바카라를 마주할 때, 우리는 문명과 자연, 기술과 감성의 경계를 함께 바라본다. 그 안에서 인간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가 만들어낸 이 아름다움은, 자연의 일부인가 아니면 창조적 도전인가?”

문정기
도곡면 천암리 출생
화순저널 고문
공학박사
현 만안연구소 소장, (사)평화통일시민연대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