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째 태극권을 배우고 있다. 태극권을 배우면서 빠른 속도에 익숙해져 있던 나를 느린 속도로 길들이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태극권을 안 해본 사람은 태극권의 느림을 쉬움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지만, 아니다. 느리면 느릴수록 어렵다. 그래서 하수는 빠르고 고수는 느리다.

태극권 사부님 말씀으로는 ‘몸을 느리게 움직이면 대근육뿐 아니라 소근육과 미세한 신경망 하나 하나에까지 뇌에서 보낸 신호가 전달되고 그럼으로써 함께 협력해서 동작을 이룬다’고 한다. 그런데 몸을 빨리 움직이게 되면 전달과 소통의 겨를이 없기 때문에 대근육의 움직임만으로 동작이 이루어짐으로써 다른 부분을 소외시키게 된다. 조화로운 협력이 빚어내는 움직임이 아니라 강제와 폭력으로 탈취한 움직임이 되는 것이다.

최근 에너지 고속도로, 그러니까 대규모 송전선로 건설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내가 느끼는 우려가 그것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뚜렷한 목표의식과 확고한 추진 계획을 가지고 관계된 많은 지역을 무턱대고 끌고 가려는 인상을 받는다. 지역 주민과의 충분한 소통은 서류상에만 있을 뿐 그들만의 결정을 주민들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간다. 시골(지역)은 도시와는 또 다르게 삶의 터전이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시골에 살면서 나는 내가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내가 사는 장소와 한몸이다. 장소를 공유하는 비인간 동식물은 가까운 친인척이다. 따라서 내가 사는 장소에 가해지는 폭력은 내 존재를 뿌리째 흔드는 일이 된다. 우리나라가 AI 강국이 되기 위해서, 싼값의 친환경 전기를 펑펑 쓰기 위해서… 나는 그러한 대의를 위해 내 뿌리를, 친인척을, 그러니까 목숨을 담보로 하고 싶지는 않다. 나뿐 아니라 다른 장소에 뿌리 내리고 사는 사람에게도 그러한 재앙이 닥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이런 나의 바람이 성장, 발전, 진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초라하다는 것을 안다. 왜 우리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발전만을 추구하는 지경이 되었을까? 그동안 그러한 극단적 발전주의 때문에 장소를 잃어버린 무수한 생명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못해서 쓰리다.

다시 태극권 이야기로 돌아가서 태극권에는 진보와 함께 퇴보의 동작이 있다. 처음 퇴보 동작을 하면서 내가 느낀 충격은 상당했다. 여태껏 진보는 좋고 퇴보는 나쁘다는 인식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진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막다른 벽, 그러니까 최후의 보루 앞에서는 다시 뒤로 나아가 제자리로 가는 것이 퇴보였다. 진보가 좋고 퇴보가 나쁜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퇴보가 필연적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끝을 모르는 성장과 발전, 진보밖에 모르는 진보는 그 자체로 파국이다. 하나같이 지속가능한 미래를 말하면서 어떻게 진보만을 고수할 수가 있나. 성장과 발전이 아닌 성숙을, 맹목적인 진보가 아닌 지혜로운 퇴보를 모색할 때가 아닌가 싶다.

정청라
이양면의 귀농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