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희 다트 세계챔피언, “엄마, 미안해요.” 눈으로 말하다

인터뷰
조광희 다트 세계챔피언, “엄마, 미안해요.” 눈으로 말하다
26살 건강한 청년, 어느 날 희귀병으로 전신마비 판정
갓난아기처럼 다시 기고, 앉고, 일어서고, 걷기까지
  • 입력 : 2021. 11.13(토) 08:58
  • 김지유
강연 후 자신의 책 <숨 쉬는 냄새도 맛있다>를 독자에게 사인해 주며 활짝 웃고 있는 조광희 다트 세계 챔피언
26살의 건장하던 성인 남성이 어느 날 벼락 맞듯, 온몸의 신경과 근육이 망가져 가는 희귀병길랑-바레 증후군 판정을 받았다. 전신마비로 호흡까지 불가능해지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몸과 사투를 벌였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재활치료와 운동으로 5년여만에 다시 찾은 일상생활. 그래서 숨 쉬는 냄새까지 맛있었다는 ‘조광희 다트 세계 챔피언’.

화순군 다트 연합회 회장 겸 전남 장애인 다트연맹 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병안 회장의 소개로 조광희 다트 세계 챔피언을 화순저널의 인터뷰 석에 초대했다.

김병안 회장이 운영하고 있는 ‘야놀자 다트샵’에 들어서니, 벌써 여러 사람들이 모여 조광희 선수가 직접 쓴 ‘숨 쉬는 냄새도 맛있다’는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전신마비 장애를 극복하고 다트 선수가 된, 여전히 온전치 못한 신체조건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다트 대회에서 기적 같은 성적을 거둔, 자신이 출연했던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방송에서처럼 그늘진 곳에 꿈과 희망을 전하며 온몸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불사조 조광희 선수의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 주>
조광희 선수가 쓴 직접 쓴 책 <숨 쉬는 냄새도 맛있다>

2005년 초봄 어느 날, 쌀쌀한 날씨 탓이었을까? 한 건물에서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몸속에서 벼락이라도 치는 느낌, 내 몸 위로 커다란 통나무가 엎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 이런 느낌이지?’ 심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 번째 계단부터는 숫제 온몸을 눕힌 채 미끄럼틀을 타듯이 내려와야 할 정도가 됐다.

거리로 나와 걷는데 서너 명쯤이 내 몸에 올라타 있는 것처럼 몸이 무겁다.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너무 힘들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내가 절반쯤 건넜을 때, 사람들은 이미 다 건너갔고 신호등은 빨간 불로 바뀌었다. 위험하고 심각한 상황이다.

일하던 가게로 걸어가는데 심한 갈증이 났다. 가게로 올라가는 계단 한 칸의 높이가 8cm 정도였는데 안간힘을 써야 한 칸씩 오를 수 있었다.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알바에게 물을 달라고 해서 물컵을 받는데 자꾸만 컵이 손에서 빠져버렸다. 기가 막히고 믿기지 않은 상황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러고 있는 내 얼굴이 낯설고 얼얼한 느낌이었다. 컵을 두 손으로 겨우겨우 붙잡고 물을 마셨다.

한의원에 가서 빨리 침이라도 맞으면 마비 증세가 풀리려나 해서 양말을 찾아 신으려 발을 올리는데 올라오지도 않고 양말이 벌려지지 않았다. 이미 급속도로 내 몸이 굳었으며 말을 듣지 않았다.

한의원에 가서 2층 진료실로 올라가려고 오른발을 먼저 어렵게 내디뎠다. 그런데 왼발이 따라오지 않았다. 애를 쓰다가 결국 포기하고 포복 자세로 2층까지 기어 올라갔다.

한의원으로 달려오신 엄마는 놀란 표정으로 연거푸 “광희야,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물으셨다. “나도 모르겠어.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엄마도 나도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이 사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의원에서는 병의 심각성을 눈치챘는지 빨리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큰 병원 응급실을 찾아갔다. 그 병원에서 진단받은 병명은 ‘길랑-바레 증후군’이라는 신경이 마비돼 가는 염증성 다발 신경병증의 하나였다.

응급실에서 처방받은 약을 급히 투여했지만 몸은 거의 다 마비된 상태였다. 다음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폐에도 마비가 와 점점 숨도 쉬기가 힘들어졌다. 치료제조차 없는 희귀병을 앓게 된 나는 내일이라는 미래가 사라지고 있었다.

중환자실로 들어간 날 새벽녘, 누군가 내 몸을 마구 흔들어대며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눈을 떠보니 인턴과 간호사들이 나에게 인공호흡을 해 주고 있었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있던 내가 밤중에 호흡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난 긴 잠을 잔 것 같은데... 방금 전 내가 죽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공포가 밀려왔다.

천장만 쳐다보며 울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예고도 없이 죽음이 닥쳐올 것이라는 공포와 두려움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대형 의료사고, 병증 악화 등으로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을 왔다 갔다 하면서 그때마다 엄마에게 죄송스러웠다.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눈으로만 수없이 ‘엄마, 미안해요.’를 외쳤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목숨을 이어가던 중 어느 날 문득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산소호흡기를 떼고 숨 쉬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숨 쉬기 연습부터 시작했다. 그 덕분인지 초봄에 중환자실에 들어갔었는 가을쯤 산소호흡기를 뗀 후 개인 병실로 옮기게 됐다.

병실에서도 정상적인 호흡은 불가능했으므로 목에다 고무풍선을 꽂고 산소를 넣어주었다 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산소가 들어올 때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를 수 있게 되자 나는 그동안의 어처구니없이 겪어야 했던 공포와 절망, 아픔, 회한, 기쁨 등이 범벅된 감정을 담은 한마디로 내밷었다. “아이 씨팔!”
이 단말마 같은 비명이었지만 5년여만에 내 목소리를 듣게 된 엄마는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그날 이후 나는 산소가 들어올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엄마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 나 때문이야. 미안해, 미안해.” 엄마는 펑펑 우셨다. “광희가 이제 말을 하네!”

얼마 후 코에서 위까지 연결된 호스를 빼고 휠체어를 탈 수 있게 됐다. 휠체어를 타고 화장실에 갔다가 1년만에 거울로 내 모습을 보게 됐다. 내 몰골은 영양실조 걸린 아프리카 난민촌 어린이같이 뼈와 껍질밖에 없었다...
화순 '야놀자 다트샵'에서 강연 중인 조광희 다트 세계 챔피언의 모습

몇 달이 지나자 또 다른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한 병원에 어느 기간 이상은 입원이 불가했다. 다른 병원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집으로 왔다. 다시는 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 있으면서 운동을 하는 데 필요한 장비를 하나씩 구입했다. 팔꿈치로 컴퓨터를 켰고 빨대를 입에 물고 자판을 쳤다. 원인도 정체도 알 수 없는 희귀병을 앓은 지 2년이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재활운동을 시작한 셈이었다. 집에서 할 수 재활운동이란 혀를 굴려 리모컨을 누르고 목을 좌우로 흔들거나, 양쪽 어깨를 들썩거려 옆으로 구르면서 몸을 뒤집는 정도였다.

유아용 안전매트 장판지가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깔고 매트 위를 김밥처럼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그르면서 땀을 종이컵으로 두 컵씩 정도 흘렸다. 하루 3시간, 6시간, 9시간 동안 30분 운동 30분 휴식을 원칙으로 정하고 아주 천천히 시작을 했다. 숨넘어갈 듯 헐떡였지만 살아 있으면 된다는 생각 하나로 버티고 또 버텼다.

엄마의 심정은 복잡하신 듯했다. 성인이 된 아들이 갓난아이처럼 옆으로 구르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매트 위에서 몸을 말고 몸통을 굴리고, 관절을 굴렸다. 이런 식으로 2년 7개월쯤 했는데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루했다.

<다음 2편에서 계속>
김지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