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찰] 시간이 멈춘 곳, 침묵을 향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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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찰] 시간이 멈춘 곳, 침묵을 향한 여정
시간을 비켜난 시간여행 <시간의 숲>
7200년의 시간을 품은 삼나무 '조몬스기'
  • 입력 : 2022. 02.07(월) 05:57
  • 화순저널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밭은 고요하다
흙은 고요하다
벌이가 안 되는 것은 괴롭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은
고요함이다.

― 야마오 산세이의 시 「고요함에 대하여」 일부

나는 이 시를 아주 오랫동안 음미해왔어. 눈으로 읽고, 소리 내어 읽고, 시를 읽는 내 목소리를 다시 듣고, 때로는 노래하듯 멜로디를 얹어 읽고, 그리고 다시 고요함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는 일. 그러기를 몇 차례……, 내 몸속에 고요함이 가득 들어차는 걸까.

당신은 지금도 바쁜 일상에 쫓겨 나의 여흥을 한가로운 사치로 여기고 말겠지만, 제발 부탁이야. 이번의 영화 ‘해찰’만은 찬찬히 읽어주길 바라. 기왕이면 영화를 찾아 감상하기를 권하는 것도 말이야.

영화배우 박용우는 바쁜 일정 가운데에서도 짬을 내어 아주 특별한 여행을 하는데, 그 목적지는 일본 가고시마 남단에 자리한 섬인 ‘야쿠시마’.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 숲이 실존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한 그곳에 사는 신령스러운 노인, 7200년의 시간을 품은 삼나무, ‘조몬스기’가 실존하는 숲이야.

“태초에 숲이 있었다.”라고 시작하는 내레이션은 “모든 여정은 기억을 위한 것이다. 언제나 시간은 기억을 지웠고, 언제나 기억은 시간을 만들었다.”라는 박용우의 목소리에 어느덧 신령한 기운을 받은 듯 마른침을 삼키는 나.

“나는 호텔 앞에 거대하게 솟은 산봉우리에 시선을 뺏긴 채 물 한 컵을 마셨다.” 박용우는 돌연한 고독이 당황스러운 듯 보여. 말 그대로 “되는 게 없는” 현실의 바깥. 사슴과 원숭이들, 그리고 신비한 숲의 존재들……. 하지만 여행의 목적을 다시금 환기시켜주는 흐린 건물들과 인파 속의 <나>를 돌연 깨닫지. 그리고 이곳에서 만나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 여정을 함께할 일본인 여배우 타카기 리나(이하, 리나)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여행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메모를 들려주는데, ⓵ 배우 내려놓기. ⓶ 원망하는 마음 비우기. ⓷ 여자와 편하게 지내기. ⓸ 사람들과 소통하기. ⓹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꾸기. ⓺ 솔직해지기. ⓻ 스트레스 해소하기. ⓼ 자연과 교감하기. ⓽ 많은 사람들 전화번호 받기. ⓾ 이 모든 것들을 위해서 매일 조금씩 기도하기. ……따위들은 너무나도 일상적이어서 아직은 어느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탓일 거라고 생각하게 했어.

마침내 울울창창한 숲에 들어선 그들은 숲과 꽃들의 향기에 호들갑스럽게 반응해보고, 나무들과 숲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간을 만지듯 이끼에 손을 얹으며 어쩔 수 없이 왜소해지는 마음. 죽은 나무의 둥치 위에 다시 생명력으로 치솟는 나무. 거기에 함께하는 이끼와 새싹들. “이 섬의 사람들은 숲은 바다의 연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경이로운 생활의 발견. 바다와 숲은 서로 어울려 매일 매 순간 초록의 이끼와 생명력을 길러낸다는 것인데.

이끼를 만지면, 그 부드러움만으로도 시간을 만질 수 있을까. 나아가 마음속 응어리들을 해소할 수 있을까. 나는 두렵기조차 한 고요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당신의 의식을 비켜나버린 동안의 나, 혹은 당신의 외면이 빚은 단절감 속에 내팽개쳐진 순간 소스라치며 깨어나는 실존으로서의 나. 그래서 용서와 화해를 생각하지만 <결단코>라는 부사처럼 날카로운 인연들.

원숭이 2만, 사슴 2만, 사람 2만
그런 시대가 있었다
옛날에 분명히 있었다.
원숭이 2만, 사슴 2만, 사람 2만
그것이 이 섬의 과거
원숭이 2만, 사슴 2만, 사람 2만
그것이 이 섬의 미래

― 빅스톤 밴드의 노랫말 「원숭이 2만, 사슴 2만, 사람 2만」 일부

시인 야마오 산세이의 시를 다시 떠올리게 되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그는 또 “마음을 주면 집 앞의 작은 나무도 조몬스기가 될 수 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박용우도 리나도 신령스러운 노인―조몬스기를 만날 수 없을까 걱정하지. “만나고 싶어 했던 오래된 나무는 흰 눈의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고, 며칠째 산으로 가는 길은 폐쇄되어 (…) 부디 따뜻한 바람이 불고 봉우리를 뒤덮은 하얀 눈이 녹아내려 숲의 길이 열리기를 신령스러운 노인과 이 섬의 모든 나무들에게 기도했다.”

나는 도대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몇 그루의 나무를 심었을까. 당신의 울타리에는 어떤 나무가 자라 그늘을 짓고 있는지 묻고 싶어지기도 했어. 하지만 어차피 대답을 듣고자 하는 건 아니라고 당신도 알겠지. 그렇지만 나는 이 순간 소망 하나가 생겨났어. 나만의 <조몬스기>를, 영혼처럼 나의 그늘이 되어주는 나무를 품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도시의 일상화된 소음들. 인터넷과 온갖 정보로 유통되는 문자로 범람한 관계들. 그런 상념들은 떨칠 수 없지. 다시 돌아가야 할 현실을 순간순간 자각할 수밖에 없는 어찌할 수 없는 시간. “곧 다시 그 시간들로 나는 돌아갈 것이다. 여행의 목적은 곧 기억을 정리하는 것이며 먼 곳에서 지금의 나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것이다.” 박용우는 숲을 거닐며 빗소리를 듣지. 하늘을, 강을 오래오래 바라보지. 그런 순간을 감사해하며, 불안과 두려움을 떨치고 신령스러운 노인의 산을 오를 것을 결심하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오랜 체득(體得). 하지만 쌓인 눈이 발목까지 빠지고 꽁꽁 얼어버린 산길. 비와 눈이 내리는 숲은 더욱 아연해지고 멈춰 서면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하지. 결국 말을 잃어버린 채 불가능해진 <조몬스기>로의 결행.

“신령스러운 노인의 숲은 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인간의 상상력만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7200년이라는 시간의 너머.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연과 신의 뜻을 깨닫고 마는 거였어. “나는 지상의 짧고 부박한 인간의 시간으로 돌아와야 했다. 돌아오는 길마다 안개가 퍼졌다. 모든 여정은 기억을 위한 것이다. 언제나 시간은 기억을 지웠고, 언제나 기억은 시간을 만들었다.”라는 내레이션은 차라리 겸허의 자리처럼 텅 빈 울림을 자아내고, 그리고 여행은 끝나지.

숲은 흙과 나무를 감싸고
침묵하며 살고 있다
사람은 그 숲으로 돌아간다
숲은 하나의 커다란 어둠이며
자비이다
사람은 그 숲으로 돌아간다
숲 깊은 곳에는 물이 흐르고 있다
그 물 또한 숲이다
사람은 그 숲으로 돌아간다

― 야마오 산세이의 시 「숲에 대해」 일부

박용우와 리나는 다시 마을로 돌아오고, 저만치 먼 풍경을 바라보는 리나. 박용우는 묻지. 뭘 보고 있어? 연결! 리나는 씩씩하게 대답하지. 물이 이어진…… 그곳. 보니까 어때? 박용우는 다시 묻고, 좋아! 라고 활기차게 대답하는 리나. 또? 박용우는 마치 신령스러운 노인에게서 듣고 싶었던 해답을 찾듯 다시 묻지. 예뻐! 예쁘다는 말이 주는 감동이 사람의 마을에 고스란히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한 걸까. 바람을 다시 느끼고 숲을 돌아보며 그 향기들을 떠올리는 순간이 마음속에 <조몬스기>라는 영겁을 받아 들이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걸까.

일본어에는 “고토다마(ことだま [言霊])”라는 말이 있다고 리나는 말했지. 즉 “말의 영혼”, 말하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는, 생각이 있어도 마음속에 감추어두면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지닌 은근한 충고를 당신에게 권하는 건 섣부른 일일까. 바람, 나무, 비, 구름…… 그리고 덧붙여 당신이 떠올릴 일상화 된 상념들에 대한 예의로써의 침묵의 필요. 비록 <조몬스기>를 만나지 못했지만, 박용우의 일상은 여전한 현실. 차라리 또 한 겹의 망각이 활력이 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렇듯 엄연해서 <조몬스기>로 인해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감상.

시간을 비켜나버린 <시간의 숲>을 열흘 동안 여행한 박용우는 여전히 영화배우로 살아가지. 삶은 그렇게 정해져 있는 거였어. 하지만 그는 뭔가 달라져 있기를 바라는 거 같았어. 그 숲에, 그 나무에, 그 바람에, 그 빗속에 흔적 없이 버린 지난날들의 생채기를 망각하듯. 그렇듯 내게도 <시간의 숲>의 여정이 주어지면 어떨까. 과연 비우고 버려야 할 게 그토록 많은 걸까. 아니면 어떻게 달라지고 싶은 걸까. 7200년보다 더 오래된 나의, 혹은 당신의 동네에 있는 뒷산이며 개울이며 나무와 돌멩이들이며 사람들의 얼굴마다 새겨진 오래된 사람들의 자취들 앞에서 나의 여정은 어디를 향할 수 있을까. 간혹 하늘을 바라보고 마음속에는 <고요>를 다시금 깊이 끌어안고서 깊은 침묵에 대해 감사할 수 있을까.

시간의 숲 (2012, 한국)
감독 ; 송일곤
출연 ; 박용우, 타카기 리나

<채어린 자유기고가>
화순저널 hsjn200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