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없는 책 읽는 법과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법 아는 이는 드물어라
―채근담, 「彈 無絃琴」에서

장마가 지루하게 지속되는 요즘 당신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는 동안 오늘은 부쩍 애틋해지는 마음이 되고 말았는데, 언제부턴가 마음속 등불과 같은 <영웅>을 나는 기다렸던 거 같았어. 하지만 영웅은 나타나지 않았지. 암중모색으로 방황하는 세월의 뒤안길에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던 뜨거운 손, 그리고 순결한 미소……. 이러한 생각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는 건 내가 여전히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일까. 그래서 어디선가 초인(超人)이라도 불쑥 나타나길 바랐던 것일까.

말줄임표(……)에 묵혀두어야 했을 마음 한 갈피를 꺼내는 일처럼 영화 <영웅>은 내게서 한 편의 비망록일지도 몰라. 먼저 말하지만, 이미지만으로도 심원(深原)이 너끈한 영화였으니까 말이야. 특히 인상적인 색채와 음악은 상상력이 필요했고, 극도로 절제된 대사는 시적 언어를 떠올리게 했지. 그리고 <영웅>을 묘사하는 이른바 미장센들은 오방색(五方色)과 무현금(無絃琴)으로 이해할 수 있었지.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

먼저, 오방색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말해보자면,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玄)의 다섯 가지 기본색을 말하는데, 청(靑)은 동방, 적(赤)은 남방, 황(黃)은 중앙, 백(白)은 서방, 흑(黑)은 북방을 뜻하는 의미로도 풀이하지. 여기에서 황(黃)은 그 중심부가 되므로 사색(四色)과 사방(四方) 등을 수렴하지. 그 의미를 또 넓히면,

청(靑)은 봄이며 기쁨(喜)을 뜻하고,
적(赤)은 여름이며 성남(怒)을 뜻하고,
백(白)은 가을이며 슬픔(哀)이고,
흑(黑)은 겨울이며 즐거움(樂)을 뜻하지.

아직도 <영웅>을 기다리고 있는가?

영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무명을 비롯해서 파검, 비설, 장천 그리고 진왕 영정이야. 그렇지만 내가 기다리던 초인은 암살자도 절대권력자도 아니었어. 초라한 아버지의 어깨가 그러했고, 영원토록 변치 말자던 소꿉친구의 주먹이 그러했지. 또한 사표로서 좇았던 유명(有名)은 변절하기 일쑤였으며 이 세상에 단 하나일 것 같던 사랑은 청바지처럼 낡아가고 찢겨갈 뿐이었던 거야. 그렇다면 나에게 <영웅>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이었을까.

무명(無名)은 일개 하급관리에 불과하지만 암살자들을 처단한 <영웅>으로서 진왕 영정의 부름을 받지. 백 보 이내에 사람을 들이지 않는 엄중한 경고를 받고 진왕을 알현한 무명은 곧 십 보까지 근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 하지만 숱한 암살자들을 경험한 진왕은 뛰어난 무예의 가신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일개 하급관리가 성공했다는 것을 의문하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장면 중 하나는 무명과 장천의 결투야. 장천은 바둑과 음악으로 세상을 주유하며 사는데, 초유의 무공을 지닌 협객인 그는 자신의 무공에 대적할 자가 없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지.
청(靑)은 봄이며 기쁨(喜)이라고 했지. 그 비유는 빗방울과 흑백의 농담 같은 칼과 창의 충돌, 숨소리조차 무협인 두 무사의 간격이었어. 서로를 갊아 들고, 흔들어 파고들면서 절묘한 예각을 빚어내는데, 숨 가쁜 결투를 여백으로 비워내 버리는 듯 떨어지는 빗방울과 현악기는 어쩔 수 없는 불협화음(不協和音)일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도 몽환적인 공감영역은 어떻게 빚어지는 걸까. 그 이유를 나는 현이 끊어지는 악기에서 보려고 했는데, 무현금(無絃琴)은 <영웅>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토록 불편한 아름다움 말이야.

나는 듣고 말았어. 현이 끊어진 자리. 음악이 사라진 자리에 극단의 침묵이 도사린 것처럼 단절의 순간과 어울리는 건 아무것도 없으리라 생각했지. 하지만 장천의 심장을 파고드는 무명의 검. 마침내 춤을 멈추고 쓰러지는 장천에게 남은 건 기이하게도 무현금(無絃琴)의 자리처럼 정중동(靜中動)이 아니었을까. 소리 없이 듣는 귀와 영혼의 충일은 아니었을까. 진공묘유(眞空妙有)를 깨닫고 말았을 위태로운 숨소리는 또 아니었을까.
헌데, 이 장면의 기쁨(喜)은 도대체 무엇이며 누구의 것이어야 할까. 당신이며 나이며 혹은 <누구>일 수도 있는 <영웅>은 누구여야 할까?
무명에게서 파검, 비설, 장천 들과의 결투에 대해 전해 듣지만 진왕은 속지 않아.
“하지만 자넨, 한 사람을 과소평가했어.”
“그게 누굽니까.”
“바로 나야.”
그 순간 <영웅>은 새로운 영웅이 필요하게 되지.

공활한 <영웅>의 삶과 죽음

무명이 자색 옷을 입고 찾아간 곳은 파검과 비설이 은둔해 있는 조나라 학문의 요람이었어. 그리고 <검(劒)>이라는 서예를 청하지.
붉은 색은 여름이며 성남(怒)이라고 했어. 무명이 청한 글씨를 위해 파검은 붉은 색의 먹을 찾지만 비설은 파검의 몸종 월령을 질투하고, 파검은 장천과 비설의 관계로 상처받은 탓에 서로를 외면하고 있었지. 하지만 3년 전 진왕의 암살을 도모했을 때 파검은 암살을 포기했었는데, 그 실패 때문에 비설은 파검을 원망했고 사랑을 불신하게 된 거였어.
사막을 배경으로 한 이 장면들에서는 붉은 색이 주조를 이루는데, 파검과 비설의 비극적인 사랑과 암살을 대하는 영웅들의 대의명분을 은유하는 색이지. 그러니까 남쪽에 해당하는 방위의 붉은 먹과 의상들은 치밀하게 의도된 미장센이었던 거야.

거사를 준비하는 무명과 파검과 비설이 함께 대의를 도모하는 장면의 주조색은 하양이야. 백(白)은 가을이며 슬픔(哀)이라고 했어. 그러니까 온통 탈색된 듯 을씨년스러운 사막에서의 하얀 옷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지. 그들의 논쟁에서 파검은 거사를 포기하기를 바라고, 비설은 무명을 돕기로 하지. 결국 거사를 위해 떠나는 무명에게 파검은 모래 위에 두 글자를 써서 암살에 대한 대의를 다시 물어.
―天下.
사랑과 질투로 인해 불화에 빠진 파검과 비설의 틈을 파고든 게 전략이었다고 무명이 고하지만, 진왕은 즉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제국 건설을 앞둔 진의 시황제 영정은 무명에게 다시 묻지. 사소한 감정에 휘둘린 <영웅>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진왕이 두 글자에 담긴 파검의 뜻을 묻자 무명이 답하기를,
“한 사람의 고통은 온 천하(天下)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하지만 영웅을 실패한 사람들은 더 이상 <영웅>을 기다리지 않는 법이지. 그래서 당신이 익숙한 비애와 냉소로 터득해버린 희망이 유일한 삶의 비법이라고 생각할까봐 걱정 돼.
이 영화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는데, 그건 바로 죽음의 상징인 검붉은 피의 배제야. 유일하게 피로 인식되는 장면이 있는데, 비설과 월령의 결투에서 비설의 검에 맺힌 핏방울이었어. 하지만 핏방울은 오히려 영롱하다 못해 신성한 눈물로 읽혀지기까지 하는데, 당신은 검에 맺힌 영롱한 그것을 어떻게 느꼈을까.

마침내 진왕은 “죽어도 여한이 없는” 눈물을 흘리며 “십보필살검법”의 무명에게 자신을 검을 내어주지. 천하(天下)라는 글자를 남긴 파검으로부터 감명받았던 거야.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했던 <영웅>의 고독이 순간 발현되었던 것인데, 이미 십 보를 허락한 그는 자신의 운명을 무명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어. 영웅이 왜 <영웅>일 수밖에 없는지, 그 물음을 당신에게 던지는 “말 걸기”의 장면인 거야. (하지만 굳이 대답하려고 애쓰지는 마!)
그리고 돌아서는 진왕은 <검(劒)>이라는 거대한 서예와 마주하게 되지. 파검은 검을 터득하기 위해 서예를 정진했다지만 서예로 쓰인 <검(劒)>은 진왕에게 새로운 경지를 깨닫게 하지. 이때 진왕의 경탄의 목소리는 자유를 얻은 자만의 환호가 아니었을까.
“……이제야 알겠도다! (…) 검술의 최고의 경지는 손으로도 마음으로도 검을 잡지 않고 모든 걸 포용하는 큰마음이다. 최고의 경지는 곧 살생이 없는 평화를 뜻하는 것이다.”

척박한 현실을 버티듯 살아가는 당신에게 “큰마음”은 과연 어떤 경지일까. 영웅을 기다리다가 스스로 <영웅>이 되지 못한 비루한 일상에 비관할 필요는 없지만, 거사를 포기하고 떠나는 무명의 “죽음”을 선택하는 진왕의 참담한 마음을 다시 묻고 싶어.
당신이 지금 거울 앞에 선다면, 과연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던 “큰마음”을 비로소 찾아보게 될까. 그런 게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다는 듯 허둥거리게 될까. 설사 그런 걸 눈치라도 채고 있었다 해도, 죽음과 삶을 결연히 선언할 수 있을까.

천하의 중심, 황색에 바쳐진 침묵

“암살이 성공하면 붉은 기를, 실패하면 황색 기를……”
성공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비설은 황색 기가 펄럭이자 파검을 추궁하지. 그러나 파검은 사랑하는 여인 비설과 고향으로 돌아가 <검(劒)>의 경지마저 지워진 삶을 희망하지만, 그마저 비설의 <검(劒)>에 좌절당하고 말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깨끗한 죽음, 흑(玄)은 겨울이며 즐거움(樂)을 뜻한다고 했는데, 검은 폭우처럼 쏟아지는 화살 앞에 자신의 자취조차 지워버린 무명의 죽음 또한 가물가물(玄)해지고 말지.

영웅이 사라진 천하에 남은 <영웅>은 과연 누구일까. 끝내 살아남은 진왕만이 <영웅>인 걸까.
마지막 남은 주조색은 노랑(黃)이야. 그것은 곧 우주의 근원이며,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상징이지. 그러므로 나는 노랑의 비유를 설명할 자신이 없어. 그건 교양으로써 접근할 수 있는 모험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런데도 다시 노랑의 중심에 가 닿아보려는 헛된 상상을 포기할 수 없다면, 어디선가 줄 끊어진 악기의 소리가 들릴 지도 모른다고 은밀한 목소리로 말해줄게.

이제 영화는 끝났어.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존재는 바로 당신일 거야. 아득한 침묵만 남은 어두운 곳에 홀로 남겨졌다고 우울해질 필요는 없어. <영웅>은 늘 그렇듯이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고대하는 존재일지도 모르거든. 그리하여 당신이 비밀스런 무기를 지닌 암살자로 살아갈 수도 있고, 줄이 없는 악기를 품을 수도 있기 때문이야.

영화 <영웅>은 중국의 역사서 「사기―자객열전 편」에 나오는 ‘형가’라는 인물의 기록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

영웅 : 천하의 시작 (英雄, 2002)
감독 ; 장예모
출연 ; 이연걸(무명), 장만옥(비설), 양조위(파검), 장쯔이(월령), 견자단(장천), 진도명(진왕)

* 채어린/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