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 이름만 들어도 설레고 자랑스런 내 고향 명승지이다.

태고 때부터 웅장한 자태를 유지해 오던 적벽이 광주시민을 위한 식수원에 포함되면서 상당 부분 물에 잠기고, 적벽으로 들어가는 입구도 위치가 싸리재 고개로 바뀌었다.

싸리재는 6.25 동란 때 외서 쪽 사람들이 내서 쪽 월산리로 소개(疏開)되어 넘어가던 고개인데, 전쟁이 길어져 낮에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인민군을 피해 월산리로 넘어가면서 애환이 깊은 고개로 이후 내내 숲으로 잠겨 있다가 작금의 적벽 입구가 되어 사람들의 집합 장소로 발길을 모으게 된다.

적벽으로 들어가면서 첫 번째 전망대가 나오는데, 탁 트인 수원지가 시원하게 보인다. 오른쪽에 풍력발전기가 몇 개 꽂힌 별산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고, 앞 안내판에 ‘거북섬’이 소개(紹介)되는데, 마치 자라가 별산에서 내려와 수원지로 들어가는 형상이어서 ‘자라섬’이라 명명하는 게 옳겠다는 생각이다. 하늘에서 보면 별산은 자라의 몸통이고 지금의 망향정 망미정은 자라의 머리 형상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별산이 한자로 자라鱉자이다.(거북이는 육지에 없음)

중간쯤에 객버리재가 나오는데 방석부 장꾼들과 이서 사람들을 외부로 통해주던 도로가 양끝이 수원지에 잠기는 바람에 반백 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겨 수북이 쌓인 낙엽길이 신비롭기도 하다.

무등산과 백아산을 등에 대고 사는 이서면과 백아면은 한때 취약지구라 하여 대부분이 군 생활을 방위로 했는데, 그들은 객버리재와 방아재를 사수한다는 사명(?)이 있었더랬다. 그 방위들의 고강도 기합 장소로 제공되던 객버리재는 이제 적벽을 가는 추억의 길목이 되었다.

적벽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초대형 파노라마는 왜 이곳이 적벽이며 천하절경인지를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옛날 적벽은 이름도 없이 그냥 절벽으로 불리다가 조선 중엽 기묘사화로 유배되어 온 신재 최산두가 적벽이라 명명한 이후로 조선의 수많은 정객과 문객들이 이곳을 찾아 국사와 정사를 논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화가 정리되고 사면 복권되어 중종임금의 부름을 받았지만 최산두는 입각을 거절하고, 자신의 고향 광양으로의 귀향도 마다하고 적벽에서 후학을 양성하다 생을 마칠 때까지 살았다.

민중시인 삿갓 김병연은 방랑시절 적벽을 두 차례나 찾으면서 여러 詩를 남겼고, 노년에 자신의 기력이 쇠함을 느끼고는 본인이 태어난 곳은 경기도이지만 그의 육신과 영혼은 전라도 적벽(당시는 적벽이 동복현에 속함)에 묻히겠다고 적벽의 남쪽 구암마을에서 여생을 지내다 생을 마감하였다.

수원지 물가에 적벽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망미정이 아담하지만 꼿꼿한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병자호란때 청나라가 쳐 들어온다는 말을 들은 적송 정지준(赤松丁之雋)은 의병을 일으켜 대항하던 중, 인조가 무릎을 꿇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낙심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적벽 바로 앞에 작은 정자를 짓고 조용히 독서하며 후학에게 학문을 전수하는 그 정자가 망미정(望美亭)인데, 여기에서 ‘미‘의 뜻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임금을 의미한단다.

인조는 그를 불러 조정에서 국사를 논하자하였지만 끝내 거절하고, 정자 이름을 망미정이라 한 것은 임금을 향한 그의 충절을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총재 시절 정지준의 높은 뜻을 기려 휘호를 써 하사한 바가 있는데, 그 현판은 지금 망미정의 측면에 걸려있다.

서울에 말죽거리가 있다면 적벽에는 편죽거리가 있다.

옛날 보암마을 뒷동산이 지금은 대나무로 우거져 있는데, 그 시절 울력으로 심었던 편백나무와 어우러져 시원하고 청량한 扁竹길을 제공해 주고 있으며, 대나무밭에 많이 있는 모기가 편백나무 덕분에 이곳에는 없다.

편죽거리에 보암마을 우물이 있고 집터의 담벼락이 있는데 고향 떠난 이들의 아픔과 향수에 젖어 숙연한 마음이 드는 곳이다.

편죽거리에 이어 송석정으로 가는 길이 한때 있었다가 지금은 막혀 있는데, 위에 언급한 정지준의 후손인 문중과의 협상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통행을 못하고 있다.
막혀있는 길을 뚫고 나가 보면 세상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없는 정원위의 정자 - 송석정이 숨어있다.

김씨 문중에서 정성들여 가꾼 정원의 잔디에 수백 년 묵은 소나무와 웅장한 이층 정자가 잘 어우러져 있고, 그 앞에 광활한 수원지의 잔잔함에 삶의 고단함과 어지러움은 그저 평온을 찾고 맑아진 마음을 느끼게 한다.

郡에서 운영하는 적벽투어 관광객들에 섞여 차를 타다 보면 “적벽, 적벽해서 와 봤더니 정작 별것 없다”는 푸념을 종종 듣는데, 이 편백거리와 송석정을 못 보고 가기에 나오는 평판이다.

미완성의 적벽공원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중단된 트래킹 코스와 편죽거리 길의 복원이 필수인바, 적벽을 그토록 사랑했던 충신 정지준의 후손 정씨 문중과의 협상을 원만히 마무리해야 하는데,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공무원에게만 맡길 게 아니라 위원회를 구성해서 지역민과 향우회, 전문가를 동원하면 큰 어려움 없이 해결되리라고 본다.

조선의 내로라하는 인물들과 수많은 민초들의 사랑과 애환이 깃든 천하절경 적벽이, 작금에 와서 물에 잠기는 수난과 길이 막혀 굴절되는 고난을 겪고 있는바, 뜻있는 분들의 열과 성을 모아서 비로소 적벽 일원에만 30만㎡의 매머드 공원이 완성되고, 싸리재에서 부터 적벽에 이르는 5km의 트래킹 코스와 어울려 명실상부한 이 고장의 명소가 위용을 떨치리라고 자부한다.

김용락
화순실학 운영위원장